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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기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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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욱
- 2016-11-18
- 조회수 249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畫; 국보 제46호)
이 벽화는 흙벽위에 녹색바탕을 칠하고 붉은색 백색 금색 등을 채색한 것으로
길이 205센티에 폭 75센티이다.
이 건물에는 보살상 사천왕상 등이 그려진 벽화(국보 제46호)가 있었지만 현재는 무량수전으로 옮겨져 있다.
사천왕상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데 훼손된 부분이 많아 원래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은 고려불화의 품격을 말해주고 있다.
안양루(安養樓)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 맞은편에 있는 누각으로, 2단으로 쌓은 높은 석축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인데 부석사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누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어 일종의 누문(樓門) 역할도 하는데 전면에서 보면 2층 누각이지만, 무량수전 쪽에서 보면 단층 전각처럼 보인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이중의 기능이 부여 되어 있어 건물 전면에는 ‘안양루’, 뒷면에는 ‘안양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이중의 기능이 부여 되어 있어 건물 전면에는 ‘안양루’, 뒷면에는 ‘안양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양(安養)’이란 극락을 뜻하는 말로, 안양문은 극락에 이르는 입구다, 안양문을 지나면 나오는 무량수전은 극락을 상징한다. 조선 중기 건물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안양루의 다포형식(多包形式)은 기둥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 공포(栱包;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를 배열한 건축양식)를 쳤으며 기둥은 통기둥과 달리 한 층 한 층 쌓아서 세운 기둥인 층단주(層斷柱) 형식으로 되어 있고, 2층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에 우물천정이다.
내부의 가구는 앞뒤 기둥 사이를 대들보가 지나가도록 하고, 그 위에 조각한 화반대공(花盤臺工; 목조 건물의 대들보 위에 설치되어 중종보나 마루보, 도리(道里) 등을 받치는 기둥)을 올려놓아서 마루보를 받치게 한 무고주 오량가(無高柱 五樑架; 높은 기둥은 쓰질 않고서 5개의 들보만 연결해서 세운 집)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천장은 井자형인데 귀틀에 천장 판을 끼우고 소란대로 고정시키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건물이지만 경사지게 끊어낸 모양으로 다듬어서 부석사의 고려시대 건물 수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누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부석사 경내의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펼쳐져 있어 조망경관이 뛰어나다.
예로부터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경치를 노래하는 시문(詩文)을 남겼는데 누각 내부에는 여러 시문 현판들이 걸려 있다.
자인당 석조비로자나불좌상(慈仁堂 石造毘盧蔗那佛座像; 보물 제 220 호)
이곳에는 3좌의 불상이 모셔져있다.
가운데 불상은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이고, 좌우 두 불상은 비로자나불상 이다.
동편불상은 나선형 머리에 얼굴은 둥근 편이고 눈은 뚜렷하지만 미소 띤 흔적이 남아있으며 어깨가 뒤로 젖혀져 있고 단정한 인상이다.
서편불상은 불신이 좀 더 풍만하고 부드러운 편이인데 통일신라 후기 작품으로 당시의 불상의 양식을 알아볼 수가 있다.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 249호)
이 석탑은 부석사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서쪽 탑은 전북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 289호)에서 나누어 온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있는 탑이고, 동쪽 탑은 크기만 다를 뿐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 거의 같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 255호)
현재 부석사 경내에 1m 간격을 두고 동서로 상대하여 서 있는 지주로 정상부에는 간을 고정시키는 구멍은 윗부분에 장방형의 간공이 하나 있다. 특히 당간지주의 아랫부분인 지면에는 간대석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 대석은 원좌로 되어 있으며 주변을 연화의 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소박 미려한 지주다. 간결하고 단아한 수법은 통일신라 초기 부석사 창건 7세기경의 작품이라 한다.
고려각판(高麗刻板; 보물 제 735호)
고려각판은 13∼14세기에 제작 되었으며, 크기는 24.3cm×45cm이다. 3종 634장(진본 239장, 주본 273장, 정원본 122장)으로 된 한역본(漢譯本)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새긴 고려시대의 목판경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불교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경전(經典)으로 《화엄경》이라고도 하는데, 《법화경(法華經)》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크고 방정(方正)하고 넓은 이치를 깨달은 꽃같이 장엄한 경’이라는 뜻의 《대방광불화엄경》은 불타(佛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 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불교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경전(經典)으로 《화엄경》이라고도 하는데, 《법화경(法華經)》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크고 방정(方正)하고 넓은 이치를 깨달은 꽃같이 장엄한 경’이라는 뜻의 《대방광불화엄경》은 불타(佛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 이다.
부석(浮石)
무량수전 서편에 놓여 있는 이 부석에는 ‘선묘설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대사는 중생을 교화하던 중 신라 문성왕16년(676) 태백산 한 기슭에서
절터를 발견하고 지세를 살펴보니 화엄종을 널리 선양할 수 있는 길지였다.
그런데 이 자리는 이미 이교도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설득을 했으나 듣지 않자 이 때 용으로 변신한 선묘(善妙; 의상(義相)이 당나라에 가서 공부할 때 양주성에 있는 어느 신도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이 집주인의 딸 ‘선묘’가 의상을 깊이 사모하였다. 의상이 귀국할 때 바다에 몸을 던지며 '용으로 변하여 대사를 모시고 불도를 이루겠다'고 원을 세웠다. 이후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 돕는다)는 善妙龍으로 변신하여 나타나 번갯불을 일으키고 봉황이 나타나 큰 바위를 세차례나 공중에 들었다 놓았다. 이에 놀란 산적들이 굴복하고 모두 의상의 제자가 되어 불사를 도왔다.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